불협화음
거장은 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까지도 조화의 일부로 작곡하기 시작한다. 무대에서 연주가 시작되기 전부터 공연의 공기와 조형물, 날씨와 삶 자체의 연속성이 이미 우리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래도록 조화를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해왔다. 잘 맞는 소리, 맞춰진 동선, 무대 위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움직임이 완성도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떤 장면들은 그 반대 방향에서 더 강하게 남는다. 정리되지 않은 리듬, 예기치 못한 충돌, 한 박자씩 어긋나는 감정들이 오히려 더 오래 머문다.
그때부터 떠오른 문장이 있다. 뛰어난 사람들은 하나의 공연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연주로 바라본다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불협화음은 실패가 아니라 재료가 된다. 어긋난 사건, 계획에 없던 변수, 갑자기 끼어드는 감정조차도 삶의 아름다움으로 승화할 수 있는 조각이 된다.
조화를 삼키는 장면
칸예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백조와 발레를 하는 사람들, 검은 발레복, 우아한 무대 장치가 먼저 들어온다. 겉으로만 보면 모든 것이 조화를 향해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화면을 따라가면 각자의 춤은 어딘가 따로 놀고, 정교한 무대의 질서 위로 힙합이라는 불협화음의 속성이 통째로 덮쳐 온다.
그 순간 우아함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백조 같은 발레리나조차 조화로운 군무의 일부라기보다, 자기만의 리듬을 가진 존재처럼 보인다. 모두가 조화를 위해 연주하지만 자연의 속성은 오히려 불협화음을 통해 더 강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 장면에서 아름다움이 정리된 균형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어긋남 속에서도 유지되는 힘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이 불협화음이라는 사실은 조금 아이러니하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좋은 글쓰기인데,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책의 제목은 불협화음이다. 좋은 글쓰기를 배우는 시간과 불협화음을 붙들고 싶은 충동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어쩌면 좋은 글쓰기란 모든 것을 반듯하게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어지럽고 맞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끝내 하나의 호흡을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삶 전체를 연주로 보는 시선
두 번째 영상을 이어서 보면 이 감각은 더 선명해진다. 무대 위의 한 장면이나 한 곡의 구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리듬이 있다. 이미 삶의 연속성 안에서 흘러오던 감정과 공기, 몸의 긴장과 해방이 음악과 섞이며 하나의 서사를 만든다. 그때 예기치 못한 움직임은 방해가 아니라 서사의 일부가 된다.
나는 아마 이런 이유로 불협화음이라는 단어에 끌리는 것 같다. 그것은 조화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조화가 삶 전체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작은 단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삶은 늘 완벽하게 맞춰지지 않는다. 그러나 거장들은 그 어긋남을 끝내 자기 음악 안으로 편입시킨다. 불협화음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더 큰 조화를 향해 가는 과정의 음이다.